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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이야기△▶

경마가 만든 감동_미국 대공황때 나타난 영웅 '씨비스킷(Seabiscuit)'

by 고급인사 2010. 2. 15.

 

 

 

 

미국의 1930년대 대공황 시절..영웅이 나타 나는데..

그것은 바로 경주마 '씨비스킷(Seabiscuit)' 이었다

 

 

Seabiscuit
1933
Hard Tack Man o'War Fair Play
Mahubah
Tea Biscuit Rock Sand
Tea's Over
Swing on Whisk Broom Broomstick
Audience
Balance Rabelais
Balancoire

 

Seabiscuit
년도 Edad Salidas 우승 2위 3위 Ganado Usd
1935 2 35 5 7 5 12,510
1936 3 23 9 1 5 28,995
1937 4 15 11 2 1 168,580
1938 5 11 6 4 1 130,395
1939 6 1 0 1 0 400
1940 7 4 2 0 1 96,580
Total 89 33 15 13 437,730

 

 

 

1933년 5월 25일, 명마 맨오워(Man O'war)의 후손으로 태어난 씨비스킷은 오랜

경기침체로 우울하고 답답했던 미국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적갈색 숫말인 씨비스킷은 켄터키의 클라이본 농장(Claiborne Farm)에서

자랐는데, 무릎은 크고 몸집이 작은 편이며 잠을 자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처음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씨비스킷’이 태어났을 당시 미국은 대공황의 여파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도시에서는 실업률이 50%에 육박,
200여만명의 실업자들이 집이나 직장을 잃고 미국 전역을 떠돌고 있었다.

‘씨비스킷’은 세계 최고의 명마 맨오워의 후손이지만,
작은 체구에다 보통 말이 먹는 식사량의 두 배에 이르는 밥을 먹는데다가
게으르고 자기 혼자 들판을 거닐기 좋아하는 구제불능 말이었다.


엄한 조교사가 ‘씨비스킷’을 순치시키다가 대성할 싹이 안 보여 포기하고,
결국 '씨비스킷'은 다른 말의 자신감을 높이는
훈련 파트너로만 이용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경주마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다 성격이 더 더러워져서 결국 폐마처럼 치부되고 말았다

 

 

 

 

 

작은 경주에 수도 없이 참가했지만 꼴찌로 들어오기 일쑤였으며,

 ‘큼지막한 조랑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3세가 되자 35회의 경주에 참가해

다섯 번의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2000달러에 자건거포 주인 출신인 마주 찰스 하워드(Charles S. Howard)에게

팔리게 되고, 고집불통으로 마주들에게 외면 당한 톰 스미스(Tom Smith)라는 조교사

 부유한 가정 출신 이지만 경제공황으로 집안이 파탄나 상처받은

레드 폴라드(Red Pollard)라는 기수를 만나면서 씨비스킷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스미스의 ‘말과 교감하는 신비스런 재주’와, 폴라드의 ‘직관적인 손’이 씨비스킷을 만나

강력한 시너지로 폭발해 최고의 경주마로 조련된 것이다

 

톰 스미스라는 조교사가 ‘씨비스킷’의 경주마로서의 가능성을 재발견하였고,
그는 굽은 다리의 ‘씨비스킷’을 처음부터 다시 조련시키기로 한다.


자동차의 개발로 인해 다치거나 달리지 못하는 등 가치 없는 말은 치료하지 않고
그냥 총으로 쏴 죽이던 시절이었기에 엄청난 용기였다고 할 수 있다.

‘씨비스킷’은 영특하긴 했지만 더러운 성질 때문에 조교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씨비스킷’은 스미스 조교와 폴라드 기수에 의해 새로 길들여져
연승가도를 달리며 신기록 제조기로 변신한다.

 

이로 인해 ‘씨비스킷’을 보려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씨비스킷'이 출전하는 경마장엔 특별열차가 운행되기까지 했다.

 

 

 

 

 

 

산타 아니타 핸디캡에서 우승을 놓치긴 했지만 다음 경주부터 연속 5회의 우승

을 차지하면서, 1937년 15회 출전해 11회를 우승하며 미국 최고의 상금마에 등극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폴라드 기수의 부상으로 조지 울프(George Woolf) 기수가 말을 타게 된다.

 

이후 1938년 씨비스킷 마주인 하워드는 3관왕으로 미국 최고의 명마 '제독'워 애드머러

(War Admiral, 맨오워 자마)에게 도전장을 냈으나 '제독'측이 받아주지 않자

마주 하워드는 매스컴 플레이를 벌이며 '제독'측을 압박하였고 미국인들도 가세하자

'제독'측은 하는수 없이 도전에 나서게 된다

 

 1938년 5월 벨몬트(Belmont)에서 1대1 경주 일정이 잡혔지만 씨비스킷의

건강문제로 불발되고 만다

 

그러나 1938년 11월 1일 드디어 극적인 대결을 벌이게 된다.

 

씨비스킷과 제독의 1대1 승부는 미국인들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라 미국 전역에

라디오로 중계되는 가운데 벌어졌다

 

 관중석이 꽉찬 핌리코 경마장 관객 모두가 워 애드머러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치열한 선두경쟁 끝에 씨비스킷은 결국 4마신 차로 승리하며

 ‘올해의 명마’ 후보에 오른후 1938년 연도대표마'올해의명마'에 올라서게 된다.

 

 

 

 

 

 [씨비스킷과 제독의 실제 경주모습]

  

 

 

 

'씨비스킷'의 승리에 전 미국인들(물론 '제독'의 마주와 팬들은 제외)이

열광했던 것은 극히 당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공황으로 인해 자신감을 상실해가던 미국인들로서는
누가 보아도 터무니없는 대결(그만큼 당시 '제독'이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에서
열악한 조건의 '씨비스킷'이 승리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들도 언젠가는
현재의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1938년 모든 언론사에서 말하기를 '언론을 사로잡은 건 루즈벨트 대통령도,
세계의 운명을 삼키려고 했던 파시스트인 히틀러와 무솔린도 아닌
‘씨비스킷’이었다고' 전했다.


 

 

 

 

 

 

 [Seabiscuit vs. Ligaroti - 1938 Match Race]

 

 

 

 

인기 가도를 달리던 ‘씨비스킷’은 그 뒤 경주 도중 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어
의사로부터 다시는 경주로에 나설 수 없다는 판정을 받게 됐으나
같은 처지로 부상을 당해있던 폴라드 기수의 지극정성으로 부상에서 회복하게 된다

 

그로부터 1년 후 심각한 부상으로 선수생명이 다했다고 생각됐던 씨비스킷과 폴라드 기수는

 단 하나의 트로피를 차지하기 위해 또 다시 트랙에 서게 된다.

 

컴백에 성공한 씨비스킷은 어려운 시절 미국인들의 가슴을 적셔준 최고의 선물이자

희망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부상후 경주에 다시 출전, 우승하며 재기의 성공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4명의 영웅이 다시 돌아온다]

 

 

 

 

[1940 Santa Anita Handicap]

 

 

 

 

'씨비스킷'의 전적은 89전33승, 2착 15회를 기록하며
13개 경주 거리별 신기록을 세웠다 
 
말 자체로는 그리 좋은 전적이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명마로 손꼽히는 '맨오워'의 전적은 21전 20승, 1회는 2착)
인생의 패배자들(말이든 조교사, 마주, 기수까지)이 모여서
하나의 드라마 같은 승리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경제 공황으로 인해 좌절했던 미국인들이 ‘씨비스킷’을 명마로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영웅은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나타나는 것이다'

 

영원히 살아있는 영웅.. 씨비스킷의 행복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