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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이야기△▶

미국경마_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주마 '맨오워(Man o'War)'

by 고급인사 2010. 2. 13.

 

 

 

20세기 최고의 경주마 맨오워(Man o'War)

21전 20승 전설의 경주마

(1917~1947)

 

우리나라에는 자료가 부족하여 여기 저기서 자료를 인용하여

맨오워에 대한 모든것을 올려본다

 

 

 

귀족 경마 가문인 벨몬트가 출신이었던 벨몬트 2세는 당시 뉴욕에 있었는데,

그날 오후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마후바가 잘 생긴 밤색 수망아지를 낳았음.”

 

1917년 3월 29일, 켄터키의 렉싱턴에서 약 3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거스트 벨몬트(August Belmont) 소령 소유의 너서리 목장(Nursery Stud)에서는 쌀쌀하고 습기찬 겨울 안개가

마방 주위로 깔린 가운데 자정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어둠 속에서 암말 마후바(Mahubah)가

밤색 수망아지를 출산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너서리 목장의 업무일지 939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입되었다.

 

 “1917년 3월 29일 - 마후바가 페어플레이(Fair Play)와의 사이에서 밤색 수망아지 출산.

이마에 반점, 그 오른쪽에서부터 코 한가운데까지 가느다란 줄무늬 반점. 신장:42, 허리둘레:33.”

 

예순살이 넘은 벨몬트는 보통 때라면 자신이 무척 아끼는 너서리 목장의 일에 전적으로

몰두해 있었겠지만, 당시는 세계대전쟁에 미국이 개입함에 따라 그도 어쩔 수 없이 전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보병으로 복무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소령의 직위로 해외

파견군의 마필을 확보하고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마필 생산자였던 벨몬트는 기회를 즐기며, 틀에 박히지 않은 일을 했다.

 

그 밤색 망아지가 태어나던 3월 29일에도 벨몬트는 마후바와 페어플레이 사이에서 잘못하면

성미가 고약한 말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 페어플레이는 ‘미치광이’헤이스팅스(Hastings)의 자마이다2) - 한편으로는 괜찮은 경주마를 생산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맨오워의 1917년 망아지때 모습]

 

 

벨몬트 소령은 이전까지 자신의 1세마들을 판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1918년 전쟁으로 인해

해외로 나갈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사상 처음으로 씨암말로 쓸 망아지 6마리를 제외한

 너서리 목장의 1세마 21마리 모두를 비공개리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살 사람을 구하지 못해, 결국 소령은 21마리의 1세마

모두를 사라토가(Saratoga) 경매에 내보내기로 했다.

 

한편 그곳에서부터 수백마일 떨어진 펜실베이니아의 글렌 리들(Glen Riddle)에 위치한

글렌 리들 목장에서는 루이스 퓨스털(Louis Feustel)이 목장주 새뮤얼 리들(Samuel D. Riddle)의

조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퓨스털은 젊은 시절 오거스트 벨몬트의 너서리 목장에서 성장하며 일을 배운 사람이다.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69년, 여든다섯살의 퓨스털은 터프 앤드 스포츠

다이제스트(Turf & Sport Digest)에 당시 벨몬트가 내놓은 1세마들을 모두 사기 위해

얼마나 리들을 졸랐는지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는 특히 마후바의 망아지를 비롯한 3마리의 말들을 갖고 싶어했다.

하지만 리들은 자신의 이웃이자 말고기에 관해서는 최고 전문가로 알려져 있던

마이크 댈리(Mike Daly)의 충고를 듣고는 그것을 거절하고 만다.

 

한 달 보름이 지난 1918년 8월 17일 어느 토요일, 사라토가 경매에는 너서리

목장의 1세마들 21마리가 모두 나왔다.

 

리들은 그 경매에 참가하여 벨몬트가 내놓은 말들 가운데 퓨스털이 점 찍어둔 3마리의

망아지 중에서 두 마리를 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마후바의 망아지가 경매에 나오자 입찰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리 와서 여기 앉으세요,

 샘(Sam). 저는 루이(Louie)를 위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 망아지를 사고 싶어요.”

 

리들은 결국 그 망아지를 5,000달러에 구입했다. 그때의 경매를 살펴보자.

1918년 사라토가 경매에서 팔린 1세마들의 평균 가격은 1,107달러였으며, 여섯 마리의

망아지들만이 5,000달러 이상에 팔렸다.

 

그리고 1918년의 그 경매에서 1만5,600달러라는 최고가에 팔린 말은 스위치(Switch)라고

불린 수망아지였는데, 나중에 이름을 골든 브룸(Golden Broom)으로 바꾸게 된다.

 

자신이 특별히 원했던 3마리를 모두 데리고 리들이 펜실베이니아의 목장으로 돌아오자,

퓨스털은 그들을 순치시키는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 마주 새뮤얼 리들(Samuel D. Riddle)과 맨오워]

 

 

경매에 내보내기 전 벨몬트 여사가 남편의 부재 중에 그 망아지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이 있었지만, 마후바의 그 아들은 훈련을 받던 처음 몇 달 동안은 그저

 ‘마후바의 망아지’로만 불렸다.

 

“순치시키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안장을 얹기도 어려웠죠.” 퓨스털이 얘기했다.

그는 “먼저 뱃대끈을 조금 단단하게 죄고 나서 주위를 걸어보게 했습니다.

 

그런 후 그것을 다시 한 번 더 조인 다음 또다시 걸어보게 했습니다. 만약 뱃대끈이

제대로 잘 죄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뛰어올라 마방 밖으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라고 얘기했다.

 

퓨스털의 동생도 그 마사에서 일을 하곤 했었는데, 자신의 빨간 머리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자주 ‘레드(Red)’라고 불렸다. 그리고 퓨스털이 이야기하기를 그 마후바의 밤색 아들도

글렌 리들 목장의 모든 사람들이 ‘레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말이 16핸드 이상 자라자, 그는 ‘빅 레드(Big Red)’로 불리게 된다.

 

1919년 봄, 그 망아지는 핌리코(Pimlico)의 아브르 드 그레이스(Havre de Grace)에서 훈련과

조교를 받는다. 그러나 퓨스털이 그의 육성을 천천히 하였기 때문에, 경주마로서의 데뷔는

그해 중반에 가서야 이뤄지게 된다.

 

퓨스털은 마후바의 아들이 첫 경주를 치르기 바로 전날 자신이 큰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 훈련도 훌륭하게 해내고, 계시원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던

그 밤색 망아지가 갑자기 아침 훈련에서 자신의 마방 동료인 디나 케어(Dina Care)에

5마신이나 뒤진 채 들어왔기 때문이다.

 

훈련 기수는 사람들이 다음날 더 높은 배당을 받을 수 있게 디나 케어가 그를 쉽게 이기도록

내버려 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퓨스털은 확신을 하지 못하고 다음날까지

계속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1919년 6월 6일, 드디어 주로에 등장한 마후바의 아들이 벨몬트 파크 직선 주로를 달리는

 미승리마 경주(maiden race)에서 5펄롱을 59초에 주파, 득의양양하며

6마신의 낙승을 거둔 것이다.

 

그에게 걸린 배당은 3-5였다. 그것이 바로 마후바의 망아지 이름(맨오워)이 출마표에

처음 나타난 때였다. 그 이름은 그 날의 경마팬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큰 의미로 바뀌게 된다. 맨오워는 자신의 경력관리를 위해 이후부터는

큰 대상경주에만 출전을 했다.

(전쟁중에 태어 났다고 해서 마명을 '맨오워'라 지었다)

 

 

 

 

 

사흘 뒤의 킨 메모리얼(Keene Memorial) 스테이크스, 그리고 11일을 쉬고 나서 출전한

유스풀(Youthful) 스테이크스에서 우승의 기록들을 쌓아감에 따라 그에게 요구되는

부담중량 또한 올라갔다.

 

그로부터 이틀 후 그의 네번째 경주인 허드슨(Hudson) 스테이크스에서 130파운드를

짊어졌는데, 2세마가 부담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중량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부담중량이 21파운드나 적은 바이올렛팁(Violet Tip)을

 1과 1/2마신 차이로 누르고 우승을 하였다.

 

1919년 8월 13일, 그는 자신의 여섯번째 경주인 샌퍼드 메모리얼(Sanford Memorial)에서

유일한 패배를 기록했다.

 

 출발이 좋지 않아 10마신이나 손해를 봤고7), 곧 무리를 따라잡았지만, 레일쪽을 파고들다가

다른 말들에게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업셋(Upset)이라는 말이었는데,

맨오워는 이후 다른 여섯번의 경주에서 그를 만나 설욕을 한다.

 

그는 켄터키더비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소유주였던 샘 리들이 켄터키까지 말을 보내는

것을 꺼렸을 뿐만 아니라 이제 겨우 3세마가 된 말이 5월에 10펄롱을 뛰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대신 맨오워는 동부에 머물며 프리크니스(Preakness)에 대비했다.

그해의 켄터키더비에서는 17마리가 출전하였는데, 폴존스(Paul Jones)가 업셋을

머리 차이로 누르고 우승을 하였다.

 

 그리고 열흘 뒤에 열린 프리크니스에서 더비에 출전했던 몇 마리의 말들이 맨오워에게

도전을 했지만, 맨오워는 출발선에서의 머뭇거림에도 불구하고10) 업셋과

와일드에어(Wildair)에 1과 1/2마신 차이로 앞서며 승리하였다.

 

1920년, 3세마 시절에도 맨오워는 불패의 연승행진을 이어가며, 각종 기록들을 경신해 갔다.

 

위더스(Withers)에서는 기수인 클래런스 커머(Clarence Kummer)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1마일 미국 기록을 0.4초 앞당기는 1분35초08의 기록을 세웠다.

 

또 벨몬트스테이크에서는 1과 3/8마일을 2분14초에 달렸는데, 이 기록은

향후 50년간 깨어지지 않았다.

 

열흘 뒤의 스타이비선트(Stuyvesant) 핸디캡에서 맨오워는 자신보다 32파운드나

적은 중량을 짊어진 옐로핸드(Yellowhand)의 도전을 받게 된다.

 

그에게 걸린 배당은 1-100으로, 만약 100달러를 걸어 맨오워가 이기면 101달러를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맨오워는 거침없이 처음부터 5마신을 앞서 나가더니, 결승

주로에 접어들면서 8마신 차이로 격차를 벌이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애퀴덕트(Aqueduct)에서 열린 드와이어(Dwyer) 스테이크스에서 맨오워는 자신의

호적수를 한 마리 발견할 수 있었는데, 다름아닌 휘트니 목장(Whitney Stables) 출신의

존그리어(John P. Grier)였다.

 

그 경주에서 그리어가 맨오워에게 무섭게 도전해 오자, 커머는 처음으로 채찍을 사용하였다.

 

결국 맨오워는 승리를 향해 내달리며, 새로운 미국 기록인 1분45초20을 수립하게 된다.

 

그 다음 주 맨오워는 자키 클럽(Jockey Club : 현재는 골드컵) 스테이크스에서 1과

1/2마일을 2분28초80에 주파해 또 하나의 미국 신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향후

17년간 깨지지 않았다.

 

그는 이어 포토맥 핸디캡에서도 와일드에어, 블레이지스, 그리고 켄터키더비 우승마인

폴존스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주에서 그는 다리 힘줄에 문제가 약간 생겼는데, 퓨스털은

그가 한 경주만 더 뛰어주기를 원했다.

 

맨오워의 경력 중에서 최고의 경주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 트리플크라운을 제패한 말로

 유명한 캐나다 말 서바톤(Sir Barton)과의 대결이었다.

 

1920년 10월 12일, 그들이 만난 곳은 케닐워스 파크 골드컵이 열린 온타리오의 윈저였다.

1과 1/4마일을 달리는 그 경주에서 맨오워는 120파운드를, 그리고 서바톤은 126파운드를

짊어졌는데, 맨오워가 무려 7마신이나 앞서며 승리를 거뒀다.

 

맨오워는 경주기록에서도 종전보다 자그마치 6초 이상이나 앞서는 기록을 세웠다.

 

맨오워는 여러 곳으로부터 출전 제의를 받았지만, 그 경주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였는데,

이미 신화적인 말이 되어 있었다.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말이 누구인가 - 콜린(Colin)15)인가 아니면

시스온비(Sysonby)인가 - 라는 논쟁은 경마인들 사이에서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둘 다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서러브레드 역사상 가장 많은 상금인 24만9,465달러를 벌어들이고 은퇴를 했으며,

1919년 6월부터 시작해 1920년 10월에 이르는 16개월 동안 경마 역사책을 새로 썼다.

 

그는 그저 기록들을 갈아 치운 게 아니라, 그것들을 영원히 지워버린 것이다

 

 

 

 [케닐워스 파크 골드컵.서바톤(Sir Barton)과 경주모습]

 

 

 

 

□ 2세마 시절 : 챔피언 2세 수말
- 킨 메모리얼(Keene Memorial) 스테이크스
- 유스풀(Youthful) 스테이크스
- 허드슨(Hudson) 스테이크스 : 130파운드 부담
- 트레몬트(Tremont) 스테이크스 : 130파운드 부담
-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호텔(United States Hotel) 스테이크스 : 130파운드 부담
- 그랜드 유니온 호텔(Grand Union Hotel) 스테이크스 : 130파운드 부담
- 호프풀(Hopeful) 스테이크스 : 130파운드 부담
- 벨몬트 퓨트리티(Belmont Futurity) : 127파운드 부담
- 샌퍼드(Sanford) 스테이크스 : 2위

□ 3세마 시절 : 올해의 말, 챔피언 3세 수말
- 프리크니스(Preakness) 스테이크스
- 벨몬트(Belmont) 스테이크스 : 20마신 차이 우승, 1과 3/8마일 세계 신기록
- 드와이어(Dwyer) 스테이크스 : 1과 1/8마일 세계 신기록
- 위더스(Withers) 스테이크스 : 1마일 미국 신기록
- 스타이비선트(Stuyvesant) 핸디캡 : 135파운드 부담
- 밀러(Miller) 스테이크스
- 트래버스(Travers) 스테이크스 : 1과 1/4마일 경주기록과 동일
- 로렌스 리얼라이제이션(Lawrence Realization) 스테이크스 :

100마신 차이 우승, 1과 5/8마일 세계 신기록
- 자키 클럽(Jockey Club) 스테이크스:15마신 차이 우승, 1과 1/2마일 미국 신기록
- 포토맥(Potomac) 핸디캡 : 138파운드 부담, 1과 1/6마일 경주 신기록
- 케닐워스 파크 골드 컵(Kenilworth Park Gold Cup) : 1과 1/4마일 경주 신기록

 

 

 

 

 1947년판 ‘미국의 경주마들(American Race Horses)’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경마기자이자

경마사가였던 조 팔머(Joe Palmer)는 맨오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그저 물리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짓밟아 버렸다. 그는 세계 기록을 세우기 위해

달린 것이 아니고, 그들을 앞지르기 위해 질주한 것이다. 그는 당대의 다른 말들에 비해

워낙 출중하였기 때문에, 존 그리어가 맞섰던 단 한 경주를 제외하고는

감히 그에게 도전할 수 없었다. 1920년은 그가 경마를 지배한 해였다.

 그 어떤 운동 선수도 - 틸던(Tilden)17), 존스(Jones)18), 뎀프시(Dempsey)19),

루이스(Louis)20), 누르미(Nurmi)21), 도프(Thorpe)22), 또는 그 어느 누구라도 -

자신의 분야에서 그런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밤색 망아지가 경주마로서 은퇴를 할 무렵 새뮤얼 리들은 그의 몸값으로

100만달러를 제의받았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말았는데, 서러브레드가 그만큼의

값을 받고 팔리기까지는 그후 35년 이상이 걸렸다.

 

맨오워의 씨수말 경력 또한 경주마로서의 그것만큼 화려하다.

 

 켄터키 렉싱턴의 히나타목장에서 그는 첫 해에 13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말이 아메리칸 플래그(American Flag)였다.

 

리들은 자신 소유의 암말 외에는 맨오워의 종부를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후손들이 세운 우승으로 인해 선두적인 씨수말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좀더 좋은 암말들과 교배했더라면 그는 아마 더욱 훌륭한 씨수말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맨오워가 배출한 후손들 중에는 트리플크라운 우승마인 워애드머럴(War Admiral),

 크루세이더(Crusader), 블락케이드(Blockade), 워히어로(War Hero), 워레릭(War Relic),

클라이드반듀젠(Clyde Van Deusen), 그리고 배틀십(Battleship) 등이 있다.

 

그는 총 379마리를 낳았는데, 그들은 모두 1,286승을 기록했다.

 

1921년부터 그가 죽기 3개월 전인 1947년까지 맨오워는 켄터키 렉싱턴에 있는 리들의

히나타목장과 뒤에 옮겨 간 파어웨이(Faraway)목장에서 대략 최소 150만명에서

300만명 이상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지역의 한 가운데 있는 작은 마을을 찾아 전세계로부터 왔으며,

목장에 당도하기 위해 좁은 시골길 - 러셀 케이브 파이크(Russell Cave Pike) -을

여행해야만 했다. 그 모두는 신화가 된 말을 한 번이라도 보려는 노력들이었다.

 

 

 

 

 

1947년 말솜씨가 좋은 그의 자상한 관리사였던 윌 하벗(Will Harbut)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최고의 말(The most horse)’23) 또한

서른살의 나이로 심장마비의 희생자가 된다.

 

 맨오워의 장례는 전 국민의 추모를 받았다.

 

1947년 11월 1일 맨오워가 서른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조 팔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옛 시절은 이제 결국 끝이 나고, 마지막 연결고리마저 끊어져 버렸다.

미국 경마계는 단 하나의 살아 있는 상징이자 동경의 대상인 최고의 정열적인

말을 잃었으며, 앞으로 그런 말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다. 그는 경마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 그를 보러 온 모든 여행객들에게 ‘경마’ 그 자체였다.”

 

팔머는 또 “맨오워가 보통의 말 이상은 아니었다고 한다면, 과거 그 어느 때에도 말이라는

동물은 없었으며, 나는 감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덧붙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의 장례는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으며 전세계 언론들이 그것을 보도하였다.

 

리들은 맨오워가 살아 있을 때, 허버트 하젤타인(Herbert Hazeltine)에게 기념 청동상을

조각하도록 주문해서 그의 무덤에 세워 놓았다.

 

1977년 맨오워와 그의 유명한 조각상은 켄터키 호스 파크(Kentucky Horse Park)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지금도 그는 차량 진입로가 끝나는 지점의 바로 그곳에서 여전히 전세계로부터

오는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20세기, 그리고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했던 서러브레드를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