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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옛날이여┫

한국경마60년_초창기~50년대까지 역사

by 고급인사 2009. 4. 23.

 [사진을 클릭 하면은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

 

 

 

한국에서 서구식 경마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 개화기 때로 학생들의 나귀경주 또는

기병 경마 등으로 선을 보였으며, 최초의 경마시행체가 등장한 것은 1922년 서울에

사단법인 조선 승마구락부가 발족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28년 신설동 경마장이 개장되는 등 전국 20여 곳에서 대·소규모의 경마가 진행되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933년 조선경마령이 시행되면서 경마는 법규에 의한

규제를 받게 되고, 경마법인에 의해서만 시행을 할 수 있게 되어 9개 경마구락부에

의해서만 경마가 시행되었다.

 

1942년 조선마사회령이 공포되면서 현 마사회의 전신인 조선마사회가 설립되고, 경마는 단일

시행체인 마사회만이 시행하게 되었으며 해방을 맞이하여 한국마사회로 개칭하였다.

 

그 뒤 한국의 경제상황과 6·25 등으로 경마가 시행되지 못하다가 1954년 뚝섬경마장이

개장되면서 비로소 경마의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40년대 바리아식 발주대 모습]

40년대의 발주기 형태는 호주식의 바리아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바리아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양쪽에 기둥을 세워서 기둥에 세줄의 로프를 걸어서 놓았다가 발주시에는 위로

들어 올리는형식으로 발마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게 진행 되다가 6.25전쟁이후 1954년도에 뚝섬으로 옮겨져서 뚝섬경마장이

개장되면서 다시 옛날식으로 주립상태의 발마가 이루어 졌습니다(주립발마란?-말들이

일렬로 정렬되서 출발신호를 청기을 들어서 발주하는 형태 입니다)

 

 

 

 초창기부터 50년대까지 역사를 지켜보며.....

 

우리나라 경마역사의 시작은 구한말 개화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선진 문물을 접한 학생들이 근대 경마를 모방해

시작한 나귀경주가 출발점이다.

 

이후 지방에서 불완전하나마 자생적으로 경마를 실시했고, 이는 근대적인

경마가 시작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근대 경마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잠시 사라지게 된다.

 

이후 1922년 사단법인 조선경마구락부가 발족하면서 최초의 경마 시행체가

등장했고, 지방에서도 법인 경마구락부가 속속 인가됐다.

 

1924년 이후 평양.대구.신의주.부산.군산 등지에 차례로 경마구락부가 발족되고

경성경마장이 신설동에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전국에서 9개 경마장이 운영되면서 전국 순회 경마를 개최하는 등 경마는 비로소

새로운 여가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군마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의 9개 경마구락부와

경마협회를 해산, 위기를 겪게 된다.

 

이후 서울 부산 대구 평양의 경마장만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현재 국내 경마산업을 이끄는

한국마사회는 해방 이후인 1949년 승마 동호인들이

주축이 돼 설립됐다

.

당시 경마는 유일한 대중오락으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승만 박사나 김 구 선생 등은 물론 고위인사들이

경마장을 자주 찾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았다.

 

백범이 호쾌한 경마 자체를 즐기기도 했지만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백범은 조국광복을 못보고 중국에서 타계한 모친(곽낙원)의 유골을 1946년 정릉 뒷산에

안장했다. 이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호송해준 때문이다.

광복 후 신설동경마장은 명사들의 휴식처였다. 군정기간 신설동경마장을 찾은 외국인

단골손님은 하지 중장과 제2대 군정장관 러치 소장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지상, 미군정장관 러치상, 미군정청

농무장관상 경마가 열리기도 했다.

국내 인사로는 이승만 김구 신익희 조소앙 최동오 김병로 조병옥 이인 등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경마장을 찾았다.그중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수시로 들렀다.

그래서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 예컨대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긴 것이다.

 


 

 [이승만박사의 경마장 모습]

 

 

[김구선생의 경마장 모습] 

 

 

 [일제 해방이후 실시한 해방기념 경주대회 모습]

 

 

 

 

 

당시 신설동 서울경마장은 하루 입장객이 4000명을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6.25전쟁으로 잠시 명맥이 끊긴 경마는 1954년 뚝섬에 경마장이

문을 열면서 부활하게 된다.

 

 

전국토를 폐허로 만든 한국전쟁은 마사회와 한국경마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신설동 서울경마장은 1951년 서울 재탈환 후 4월부터 미공군의 비행장으로 징발되었고,

부산경마장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 부산 기지사령부가 되었으며 연지동에 신설한 부산

제2경마장도 전쟁 발발 직후 미군에게 징발되었다.

 

해방 후 유일하게 남아있던 대구경마장도 1950년 7월부터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경주목장은

건물과 토지를 UN군이 차지해버렸다.

 

군산경마장은 미군의 폭발사고로 건물이 소실된 채 방치되다가 인근 주민들이 무단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바람에 농지로 탈바꿈했다. 경마사업이 유일한 사업소득인 마사회로서는

비빌 언덕조차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서울 수복 후 돌아온 마사회 임직원들은 비행장으로 징발된 신설동 경마장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가망이 없어 보이자 새로운 경마장의 건설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 마사회는 뚝섬 일대에 경마장 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원래 경마장 이전을 목적으로 1930년대 조선경마구락부 시절부터 일찌감치 토지매수를

시작하여 1940년에 착공하려 하였으나 소작농들의 반대와 태평양전쟁 발발,

경마구락부 해체 등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뚝섬으로의 경마장 이전은 중단된 상태였다.

 

 

 

 

 

 

 

 

 

새로운 경마장의 건설만이 유일한 활로였던 한국마사회는 1953년초부터 뚝섬경마장 건설을

다시 추진하여 53년 7월 28일 착공에 들어갔다.

 

이 날은 휴전협정이 맺어진 다음 날이었다. 마사회는 불용토지와 사택을 매각하여 공사비를

마련하였으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하여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1954년 5월 8일, 천신만고 끝에 뚝섬 서울경마장이 개장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중단된 경마가 만 3년 11개월 만에 재개되는 순간이었다.


뚝섬 경마는 조랑말 경주로 시작했다. 당시 충분한 마필자원을 확보하지 못했던 마사회는

광주․목포․군산․평택 등지에서 몽고계 재래종마를 모아 겨우 경마를 시행할 수 있었다.

 

개장 초기 뚝섬 경마는 주말에 하루 12경주를 시행했으며, 주로는 모래와 초지가 섞여 있고

안쪽에 채소밭이 있었으며 관람대는 지붕에 미국제 맥주깡통을 이어붙인 허름한 모습이었다.

 

 베팅은 패리뮤추얼 방식이었으나 토털리제이터(배당률 계산기)가 없어 경주 20분전에

마감을 하고 수많은 아가씨들이 주판으로 배당률을 산출해냈다.

 

대부분의 경주마가 노쇠하여 10세가 넘는 말들이 허다했으며, 어떤 경주에서는 14세 마필이

3두나 출전하기도 했다. 대부분 조랑말 경주였으나 하루에 1경주 정도는 더러브렛 경주가

끼어 있었다. 뚝섬의 경마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지금과 달리 시계방향으로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