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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마60년_1960년~80년대까지 역사

by 고급인사 2009. 4. 23.

 

 

 

 

 

 

1962년 한국마사회법의 공포와 1972년 마사회 단일경마체제가 확립되면서

한국경마는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한국경마는 1980년 제15회 ARC 개최를 계기로 1983년 올림픽승마경기장

건설주체로 지정되고 1984년 마권발매업무의 전산화를 이룩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또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제24회 올림픽에서의 승마경기를 주관하기도 하였으며,

늘어나는 경마인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설치한 장외발매소의 관리를 담당하는

경마용역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마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마사박물관도 개관하였다.

 

또한 1988년 9월, 36년간의 뚝섬시대를 마감하고 과천으로 이전, 현대식 시설의 서울 경마장을

개장하여 건전 레저로 경마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54년도에 뚝섬경마장이 개장을 하고나서

관람대에서 경마팬들끼리 툭하면 패싸움이 벌어졌는가 하면 판정시비가 벌어져

경마장 시설을 부수고 경주로에 돌을 집어던지기 일쑤였다.

 

이래서 마사회 직원들은 출근하면 경주로

모랫속에서 돌 주워내는게 첫 일과였을 정도였다.

 폭우가 쏟아지거나 인플루엔자 같은 전염병으로 경마가 장기간 쉬기도 했는가 하면

국내 최초로 경주중 기수가 낙마, 숨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개장 초기 입장객수는 하루 300~500명 수준이고 매출액도 50만~60만환 선이어서 기수

조교사들은 경주 상금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안돼 밀가루로 연명했다고 한다.

 1년에 한두번 있는 특별경주에는 부상으로 쌀 한가마가 걸려

기수 조교사들은 혈전을 벌이기도 했다.

 매출이 적다 보니 적자를 면치 못해 마사회는 월 6~7%의

고리사채를 빌어 이자를 갚기도 어려운 판이었다.

 이에 따라 70년대 들어 경마일수를 한주 4일로 늘리기도 했다.

당시 경주마수가 300~400마리에 불과하다 보니 경주 편성이 어려워 금요경마에

출전한 말이 일요경마에 다시 출전하기도 했다.

 마사회 직원이라야 30여명에 불과했고 경주마들의 성적 정보가 지금처럼 컴퓨터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경주를 편성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려 늦은 시간까지 경주를 편성하다 출전마수가 부족하면 한밤중에 잠자는 조교사를 깨워

사정사정해 출전마수를 채우기도 했다.

 이처럼 어렵게 치러진 뚝섬경마는 70년대 주 4일 경마 강행 등 안간힘을 쓴 끝에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80년대 들어 중흥기를 맞아 과천으로 이전하게 됐다.

 

 

 

 

 

 

 

 

 

 50년대 뚝섬경마장 개장이후 민자유치를 통한 경영 개선과 해외 경주마 수입,

아시아경마회의 회원국 가입 등의 노력 끝에

지난 72년 마침내 흑자경영 시대를 열게 됐다.

 

이후 1980년 제15회 아시아경마회의의 서울 개최, 1984년 전산투표시스템 도입,

1988년 서울올림픽 승마경기 지원 등으로

국내 경마는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1989년에는 과천의 서울경마공원이 개장하면서 재도약의 기회를 마련한다.

 

 

 유명인사의 방문은 60년대 대통령배 상전경마가 있긴 하였으나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고, 70년 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차례 뚝섬경마장을 방문해서 잠시

경마를 관람한 적이 있으나 그뿐이었다.

 

80년대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새벽에 경마장 구내 승마장 등을

둘러보았으나 경마를 구경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