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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마 창립60주년_1954년, 뚝섬 경마시대의 개막

by 고급인사 2009. 4. 10.

 

 [개장초기의 뚝섬경마장 모습]

 

 

전국토를 폐허로 만든 한국전쟁은 마사회와 한국경마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신설동 서울경마장은 1951년 서울 재탈환 후 4월부터 미공군의 비행장으로 징발되었고,

부산경마장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 부산 기지사령부가 되었으며 연지동에 신설한 부산

제2경마장도 전쟁 발발 직후 미군에게 징발되었다.

 

해방 후 유일하게 남아있던 대구경마장도 1950년 7월부터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경주목장은

건물과 토지를 UN군이 차지해버렸다.

 

군산경마장은 미군의 폭발사고로 건물이 소실된 채 방치되다가 인근 주민들이 무단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바람에 농지로 탈바꿈했다. 경마사업이 유일한 사업소득인

마사회로서는 비빌 언덕조차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뚝섬경마장 개장초기의 결승선 모습]

 

 

서울 수복 후 돌아온 마사회 임직원들은 비행장으로 징발된 신설동 경마장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가망이 없어 보이자 새로운 경마장의 건설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 마사회는 뚝섬 일대에 경마장 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원래 경마장 이전을 목적으로 1930년대 조선경마구락부 시절부터 일찌감치 토지매수를

시작하여 1940년에 착공하려 하였으나 소작농들의 반대와 태평양전쟁 발발, 경마구락부

해체 등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뚝섬으로의 경마장 이전은 중단된 상태였다.

새로운 경마장의 건설만이 유일한 활로였던 한국마사회는 1953년초부터 뚝섬경마장 건설을

다시 추진하여 53년 7월 28일 착공에 들어갔다.

 

이 날은 휴전협정이 맺어진 다음 날이었다. 마사회는 불용토지와 사택을 매각하여 공사비를

마련하였으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하여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1954년 5월 8일, 천신만고 끝에 뚝섬 서울경마장이 개장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중단된 경마가 만 3년 11개월 만에 재개되는 순간이었다.

 

[60년대 뚝섬경마장의 결승선 모습]

 

뚝섬 경마는 조랑말 경주로 시작했다. 당시 충분한 마필자원을 확보하지 못했던

마사회는 광주․목포․군산․평택 등지에서 몽고계 재래종마를 모아 겨우 경마를 시행할

수 있었다.

 

개장 초기 뚝섬 경마는 주말에 하루 12경주를 시행했으며, 주로는 모래와 초지가 섞여 있고

안쪽에 채소밭이 있었으며 관람대는 지붕에 미국제 맥주깡통을 이어붙인 허름한 모습이었다.

 

베팅은 패리뮤추얼 방식이었으나 토털리제이터(배당률 계산기)가 없어 경주 20분전에

마감을 하고 수많은 아가씨들이 주판으로 배당률을 산출해냈다.

 

대부분의 경주마가 노쇠하여 10세가 넘는 말들이 허다했으며, 어떤 경주에서는

14세 마필이 3두나 출전하기도 했다.

 

대부분 조랑말 경주였으나 하루에 1경주 정도는 더러브렛 경주가 끼어 있었다. 뚝섬의

경마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지금과 달리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80년대 경마장모습과 경주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