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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마 창립60주년_최초의 경마기수는?

by 고급인사 2009. 4. 7.

 

일본인 마주들에 의해 시작된 일제 강점기 시절 경마에도 한인 기수가 있었다.

원래 목장에서 일하던 마부였던 김용백이 문헌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한인 경마기수다.

마사회에 따르면 그는 1921년 5월 7~8일 양일간 용산연병장에서 개최된 조선경마대회에

출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경마대회는 조선경마구락부의 모체인 경성승마구락부에서 개최한 최초의

공식경마대회였다. 대부분 일본의 지방경마장에서 초청한 일본인기수들이 경주마에

올랐지만 초청기수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했다.

 

목장 마부들 중에서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들을 선발하여 후보기수로 기승시켰는데,

김용백이 여기에 포함됐다. 그가 정확히 어느 목장 소속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후 다른 대회에 출전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김용백에 이어 등장한 한국인 기수는 1921년 9월 23~25일 여의도경마에 출전한 기록이

남아 있는 김자근봉(나중에 김승배로 개명)과 이복남이다. 둘 다 여의도 황정목장의 마부였다.

 

특히 김자근봉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나카야마 경마구락부에서 정식기수 면허를 취득해

활동했는데, 제2회 천황배 대상경주에서 ‘하세파크’라는 경주마를 타고 우승해 한민족의

기개를 드높였다. 하세파크는 생애통산 37전 8승의 평범한 성적임에도 천황배 경주를

제패한 경주마로 일본 경마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당시 김자근봉은 하세파크의 조교사도 겸했다. 뚝섬경마장 시절 이름을 날렸던

김승길조교사(작고)가 김자근봉의 아들이고, 현재 서울경마공원에서 활약중인

김학수 조교사(44조)는 그의 손자다.

 

 

 

 

한편 이복남 기수는 여의도 경마대회 이후에도

꾸준히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전에 은퇴했다.

1930년대에 활동했던 한국인 기수로는 채일묵과 정태생을 들 수 있다.

 

 채일묵은 1932년 일본 야마구치 경마장에서 기수생활을 시작해 1938년까지 일본 경마계에서

활약했으나 기수 은퇴 후에 귀국, 1942년 조선마사회 직원으로 입사했다.

 

그 후에는 재결,마사, 경마, 업무, 마사공원, 목장 등 각 부서를 두루 거치며 간부, 이사,

고문직까지 역임하면서 경마에 한 평생을 바쳤다. 채일묵은 1973년 타계했으며

현재 서울경마공원에는 그의 공을 기리는 흉상이 있다.

 

 

 

 

 

 

 정태생은 1930년대 일본 한신경마구락부에서면허를 취득한 후 일본과 중국경마장을

전전하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귀국해 신설동 경마장에서 해방 전후에 기수로서 활동했다.

해방 당시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는 약 20여명의 한국인 기수들이 있었다. 그 중 서울 출신

최일선과 정주섭, 북조경마장 출신의 김정식과 김완기, 일본경마장 출신의 김자근봉과 정태생,

만주경마장 출신의 최인철, 한승길, 권인덕, 박원봉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신설동경마장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