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등 위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요.” 유미라는 국내에 10명뿐인 여자 기수 중 한 명이다.
160cm, 49kg의 체구로 500kg이 넘는 육중한 경주마에 올라 남자 기수들과 경쟁하다 보면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스피드광인 그는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일이 즐겁다”고 했다.
과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13년 6월 27일 동아일보 취재 기사 입니다]
[Narrative Report]똥말을 사랑한 여자… 나, 영화 속의 김태희
며칠 전 우편으로 보낸 대학 입학 원서가 반송돼 왔다. 원서 접수 마감 날짜는 이미 지났다.
지금쯤이면 대학 사무실의 책상 위 어딘가에 있어야 할 원서다. 학교가 없어진 것도 아닌데
왜 돌아왔을까. 원서에 딸려온 작은 종이에는 짧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반송 사유가 적혀
있었다. “지원 종목에서는 여자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습니다.”
고교 3학년이던 2002년의 일이다.
경기체육고를 졸업한 그는 근대5종(펜싱 수영 승마 육상 사격) 선수였다.
2002년에는 국가대표로 뽑혀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도 나갔다.
근대5종 특기자로 한국체육대에 지원했다. 그런데 여학생은 뽑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 이런 일이…. 하늘이 노랬다. 눈이 축축해졌다. 해마다 여학생을 뽑았으니까
이번에도 뽑겠지 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낭패를 불렀다.
하는 수 없이 지방에 있는 대학의 스포츠레저학과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때 수영을 시작했다. 그 뒤로 운동만 했다. 대학은 한 학기를
다니다 말았다. 이제 어쩌나….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하나…. 막막하고 답답했다.
남자들과 맞짱을 뜨고 살아야 할 운명은 이렇게 반송 우편물에 담겨 찾아왔다.
(영화 ‘그랑프리’에서 여배우 김태희의 대역을 맡아 뒷모습만 보였던 유미라는
팬클럽까지 가진 ‘얼짱 기수’다. 과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기수(騎手) 한번 해 볼래?”
딸의 처지가 딱해 보였던지 아버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경마 기수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다고 했다. 딸이 승마를 했으니 말을 타는 일이라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경마는 승마와 많이 다르다. 승마용 말은 사뿐사뿐 뛰어다니지만 경주마는
시속 60km 가까운 속도로 달린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남자들도 겁을 내기 마련이다.
다행히 딸은 경마를 잘 몰랐다. 모르면 겁이 없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아버지와 함께 경기 과천 경마장으로 갔다.
“아∼, 저런 거구나. 할 수 있겠는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경마를 눈으로 직접 보고난
뒤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고교 때 오토바이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전국을 일주했다.
취미는 수상스키와 비슷한 웨이크보드를 타는 것이다. 타고 달리는 건 다 좋아했다.
스피드 공포증도 없었다. 질주하는 경주마들을 보는 순간 이게 내 운명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유미라(29)의 기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국내 135명의 기수 중 딱 10명뿐인 여자 기수다.
남자의 벽
아버지 옆에 앉아 경마를 처음 보던 그날은 해볼 만하겠다 싶었던 경마가 막상 기수가
되고 나니 힘에 부쳤다. 어느 정도 감수할 생각은 했지만 ‘남자의 벽’이 예상외로 높았다.
경마는 성별 구분 없이 남녀 기수가 함께 레이스를 벌이는 보기 드문 스포츠다. 어차피
말이 뛰는데 기수가 남자든 여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답답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기는 했다.
‘마칠기삼(馬七騎三)’이다. 경마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건 말의 주행 능력이 70%,
기수의 기승 능력이 30%란 얘기다. 경마를 좀 아는 사람이면 대체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김기선 한국경마기수협회 사무처장은 “남녀 기수들의 능력 평균치를 따져서 핸디캡을
매기기로 한다면 남자들에게 15∼20%를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기수는 키(168cm 이하)와 몸무게(49kg 이하)에 제한을 두고 있어 남녀 간의 체격 차이는
별로 없다. 그래도 남자는 남자다. 힘을 쓰는 게 다르다. “경마는 결승선 앞에 다 와서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땐 마지막까지 말을 몰아붙이는 힘이 중요하죠.
아무래도 힘에서는 남자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요. 물론 예외도 있긴 하지만….
” 막판에 접전이 벌어질 때는 치열한 자리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럴 땐 담력도 있어야 한다.
유미라의 말처럼 예외는 있다. 한국마사회 경마인력교육원 후배인 김혜선(25)은
2009년 6월 데뷔 후 4년 만에 벌써 95승을 거뒀다. 여자 기수로는 역대 최다승이다.
여자 기수 사상 첫 100승 돌파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김혜선은 경마인 사이에서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특출한 경우여서 여자 기수들의 평균으로 보기는 힘들다. 중고교 때 핸드볼과
권투를 한 김혜선은 키가 151cm밖에 안 되지만 힘이 좋고 담력까지 갖춰 ‘슈퍼 땅콩’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유미라는 레이스 막판에 김혜선의 말몰이를 보면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이렇게 잘나가는 김혜선도 ‘남자의 벽’을 느낀다.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남자들에 비해
불리할 게 없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똥말이라도…”
남자 기수들이 가진 힘보다 더 세고 더 높은 벽은 또 있었다. “여자는 태우지 마.”
“여자는 안 돼.” 여자 기수들을 탐탁지 않게 보는 마주(馬主)들의 시선이다.
말 등에 누구를 태울지는 마주가 정했다. 모든 경주에는 상금이 걸려 있다.
상금의 80% 가까이는 마주 몫이다. 나머지를 조교사와 기수, 마필관리사가 나눠 갖는다.
돈이 걸린 일이다 보니 같은 값이면 힘 좋고 실력 있는 남자 기수를 태우려고 했다.
이러다 보니 능력 있는 남자 기수들에게는 말이 몰린다. 말을 골라 탈 수도 있다.
유미라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말 한 번 태워 주세요. 똥말이라도 괜찮아요.” 조교사들을 볼 때마다 사정하고 부탁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다. “마주한테 얘기해 봤는데 안 된다고 하시네….
” 그래도 마주한테 묻기라도 해주니 고맙다. 어떤 때는 귓등으로 흘린 적도 많았다.
데뷔를 앞둔 말을 두 달에 걸쳐 새벽마다 훈련시켰다. 그런데 정작 경주에 내보낼 때가
되자 남자 기수를 태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조교사들을 볼 때마다 머리를 숙이고 부탁했다. 자존심 지킨답시고 출전 기회가
제 발로 굴러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게 이 바닥 일이다.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죠. 웃는 얼굴에 침 뱉기야 하겠어요.”
출전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보니 첫 승이 늦어졌다. 2008년 6월 데뷔한 뒤 첫 1착(着)의
기쁨을 맛보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다. 교육원을 졸업한 동기 5명 중 가장 늦었다.
나머지 넷은 모두 남자다. “좋은 말을 자주 타야 1등으로 들어올 확률도 높아지는데
그런 점에서는 좀 불리한 면이 많았죠.”
2년 과정의 교육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5년 만에 나온 여자 후보생이라며 관심을
많이 받았다. 체력 테스트에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 달 동안 이어지는 체중 측정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여성이 기수 후보생으로 합격하기는 쉽지 않다.
그도 2004년 처음 도전했을 때는 낙방의 쓴맛을 봤다.
교육원 졸업 후 유망주란 기대를 받고 기수로 데뷔했지만 성적은 시원찮았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출전 기회가 별로 없었죠. 그러다 보니 자신감을 많이 잃었어요.
” 2011년까지 3년 6개월간 쌓은 성적이 고작 3승에 불과했다.
자존심도 접고 죽자고 열심히 하는데 나아지는 건 없었다.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다.
수상스포츠인 경정을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었다.
팬클럽에 영화 출연까지
죽으란 법은 없었다. “똥말이라도 태워만 달라”며 늘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말을 타는 일이 많아졌다. 똥말이라도 태워만 준다면 최선을
다해 훈련했다. 그의 성실함에 마음이 움직인 조교사들이 마주를 설득하는 일도 생겼다.
이렇게 출전 기회가 늘면서 승수도 쌓였다. 지난해까지 5년간 6승에 그쳤지만
올해 들어 벌써 4승을 챙겼다.
말로는 “똥말, 똥말” 했지만 똥말 덕에 이름도 많이 알렸다. 국내 경마 사상 최다인
97연패(連敗)를 기록 중인 ‘똥말’의 대명사 ‘차밍걸’은 사실상 그의 전용 말이나
다름없다. 8년생 암말인 차밍걸은 사람으로 치면 60이 다 된 나이다.
진즉 은퇴를 했어야 할 말인데 아직도 뛰고 있다. 아무리 탈 말이 없어도 이런 똥말은
기수들도 반기지 않는다. 뛰어봤자 상금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차밍걸’의 등에 올랐다. 교육원 졸업을 앞두고 기수 실습을 나갔을 때 처음 훈련을
시킨 뒤로 5년간 인연을 이어온 말이다.
상금만 따지면서 타고 안 타고 할 말이 아니었다. ‘차밍걸’이 어느 날인가부터 꼴찌
인생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경주마로 알려지면서 경마장 주변에서는 그의
이름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11년 전으로 되돌아가 지원한 대학에서 여자 신입생을 뽑겠다고 한다면? “기수로 사는
지금의 내가 더 좋을 것 같아요. 기수를 한 뒤로 팬도 많이 얻었고요. 그러고 보니
영화도 찍었네요.” ‘얼짱 기수’로 알려진 그는 회원 600명이 넘는 팬클럽을 갖고 있다.
배우 김태희가 주연을 맡아 여자 기수로 나왔던 영화 ‘그랑프리’에서 김태희의 대역도
맡았었다. 기수라 좋은 건 또 있다. 연봉이 세다. 실력에 따라 개인차가 크지만 국내
기수들의 평균 연봉은 1억 원이 넘는다. 많게는 5억 원까지 버는 기수도 있다. 여자
기수들의 평균 연봉도 7000만 원가량으로 적지 않은 편이다.
“근대5종보다는 경마가 선수 수명도 훨씬 더 길잖아요. 체력 관리를 잘해서 40대 넘어까지
기수 생활을 계속하고 싶어요.” 올해 67세인 다이앤 킹은 지난달 미국 경마 사상 여성
기수 최고령 우승을 기록했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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